성 야코비 교회(St. Jacobi Kirche) 오르간
성 야코비 교회(St. Jacobi Kirche)는 Hamburg의 루터개신교 주교회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변경과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손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시내 중심지에 있는 보존되어있는 중세시대 건축물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헤이그 조약에 의해 보호받는 문화쟁이다.
위치
St. Jakobi 주교회는 Hamburg 중심의 쉬타인가(Steinstrasse)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초기 Hamburg의 주도로 중 하나였다. 오늘날 이 거리는 20세기 통상 센터(상사, 기업 등의 해외지점이 몰려있는 장소)로 각인되어있다.
성 야코비교회(함부르크)의 오르간( der Hauptkirche Sankt Jacobi (Hamburg))
1592년 Specification
1721년 Specification
연합군의 폭격으로 뤼벡 성당(Luebecker Dom)과 St. Katharinen에 있는 대형 자매악기의 파괴 후 파이프들과 바람공급대 그리고 케이스 장식들이 1943년 교회 탑 하부의 대형 창고에 보관되었다. 창고보관을 통하여 옛 파이프들의 85%를 보존하였다. 폭격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당시 위험한 모험이었다. 나치의 권력자 앞에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오르간케이스와 연주대는 교회에 보관되어 있었고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오르간의 재건축에 쉬니트거의 제작방식개념을 현저히 벗어나고 그럼으로 옛 소리의 근본은 당시의 가능한 그리고 바람직한 표준(규격)을 참작하지 못한 개념의 이용 하에 진행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예는 오르간제작자 Kemper의 소견에 반하여 교회임원회는 Schnitger에 의해 설계된 손 건반 첫 옥타브의 짧은 옥타브의 부족한 건반들을 보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바람공급대들을 확장하였고 파이프들을 바람공급대 위에 순서에 따라 변경하여 배치하였다. 이것은 전체 바람공급을 뒤섞어 난잡하게 하였다. 그 결과 연이은 문제가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파이프의 가름대(Kern)를 분리하고 파이프 입(Aufschnitt)을 짧게 하여 가름대 틈을 변경해야 했다. 당시에는 전쟁 전 오르간의 고압력은 쉬니트거의 개념에 원인을 돌릴 수 없다는 옳지 않은 가정에 근거를 두기도 했다. 그 결과 바람의 압력은 분명히 낮추어져 일부분의 파이프들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연이은 문제는 몇몇의 고음부의 파이프들은 반음에서 온음까지 높게 바람공급대에 세웠고 파이프들은 부분적으로 현저히 짧아졌다. 이 사실은 파이프에 원래의 음표기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1993년 이후 Specification
1985년부터 1987년 까지 그로닝(Groning)의 오르간 수출업자인 Cornelius H. Edskes에 의해 오르간 복원작업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대략 30여개의 특징들이 기록되었다. 결과는 60,000개보다 많은 기록들이 모였다. 연주대는 오늘날 뤼벡(Luebeck)의 St. Annen 박물관에 있는 Schnitger의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복원 전 교회의 천장에서 원래의 쉬니트거 음색이름 표시판을 발견했다는 것은 특히 의미가 있다. 커다란 납으로 된 Posaune 32'의 울림통은 구조상 자신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울림통은 점차 찌그러졌다. 울림통들은 세심하게 다시 펴서 구리로 된 지지대로 보강하였다. 32‘의 Prinzipal 파이프들을 포함한 프로스펙트 파이프들은 새롭게 주물을 하여 쉬니트거의 원래 것에 해당하게 둥근 입으로 구부려 만들었다. 이를 위해 Juergen Ahrend는 자신의 공장천장을 뜯어야했다. 프로스펙트 파이프 금속의 함금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옛 내부의 파이프들에서 옛 프로스펙트 파이프들의 여분일 것이라 추측되는 파이프조각들을 발견하였다. 이들 파이프조각들은 분석한 결과 이들은 거의 순수한 납으로 된 함금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 조각들은 새 프로스펙트의 주물에 사용되었다.
쉬니트거의 파이프들로 된 새 오르간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게 되었다. 복원 후의 오르간소리가 복원 전의 소리와 크게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복원작업계약 후 수 많은 인정들이 있었지만 격렬한 논쟁도 역시 불러일으켰다. 몇몇의 비판자의 견해는 너무 강하고 날카로운 보이싱에 있었다. 1693년도로의 환원은 어쨌든 300년간 복합적인 오르간 건축역사의 발전이 바르지 않다고 하는 판단이 실행되어야 했다.